2023년 9월 14일 목요일

OSS, 한국광복군의 서울진공작전, 독수리 작전이 실행되었다면?

 


1. 서울진공작전의 개요

2. 만약 서울진공작전이 실행되었더라면?

1) 광복군 내부 사정

2)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3) 프랑스의 경우

4) 광복군은 전투를 치를 능력이 있었나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창설 기념. 태극기와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


1. 개요

서울 진공 작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합군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여

서울을 해방하려고 계획한 군사 작전입니다.

1945년 8월 18일 미국의 지원을 받아 광복군을 서울에 투입하여 일본 제국의 세력을 끝내고

서울을 되찾기 위한 목표를 세웠으나,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던지고 일본 제국이 항복한 결과로 작전은 취소되었습니다.

 

학교 교과서에서는 국내 진공 작전을 독립 운동의 일부로 간단하게 기술하곤 합니다.

특히 김구의 '백범일지'에서 나오는 탄식이 함께 자료로 제시되곤 합니다.

 

2. 만약 서울진공작전이 실행되었더라면?

1) 광복군 내부 사정

민족주의 세력에서는 광복군의 전략적 작전이 실패하지 않고 일본의 항복이 좀 더 늦어져서 작전이 진행되면

분단이 방지되었을 것이며, 이를 통해 강대국의 간섭 없이 독립적인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지만

이러한 가정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광복군의 병력, 장비 등이 매우 부족하여 일본군에게 이길 수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광복군 지휘관들이 이순신과 같은 연승 전략으로 이기더라도 임시정부가 설립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소련과 미국 모두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주요 열강들을 설득하지 못할 경우 결과는 허사일 것입니다.

 

한국광복군은 목적이 '승리'를 향한 것보다는 '참전'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될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독립적인 주권을 갖는 정부로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2)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전쟁 전에 이미 독립된 국가였으며,

나치에게 패배하여 점령되긴 했지만 바르샤바 봉기 등 주요 전투에서 참전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국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전쟁 후에 소련의 전리품으로 간주되어 공산화되었습니다.

폴란드의 경우, 연합군 소속으로 60만 명에 가까운 장병들이 참전했고,

이와 함께 최소 40만 명의 폴란드 국내군이 활동하였지만 그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전후 돌아온 15,000여 명의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은

나치 독일 완장 차던 자리에 빨간 완장 찬 매국노들에게 반동 취급을 받았고,

많은 폴란드 국내군 지도자들은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고문 당하고 투옥되었습니다

3) 프랑스의 경우

비록 프랑스도 거의 나치에 물들어가고 있던 시기였지만,

프랑스는 조선과 같이 존재감이 적던 아시아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프랑스는 세계 2, 3위를 다투는 강대국이였으며, 2차 대전 교전국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몇 주 만에 밀렸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역시 쉽게 프랑스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나치 점령 기간 동안에도 프랑스 식민지 중에는 비시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이나

영국의 개입으로 탈환된 시리아 지역도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파리 탈환 이후 다시 공식적으로 참전하여 자유 프랑스의 병력은 1944년에 이미 40만명이 넘었습니다.

전쟁 막바지에는 130만이 넘어서 수적으로 연합군에서 5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미군-영국군과 함께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 위해 서부전선의 주력이었지만,

독일군과 싸우는 남프랑스의 동맹군을 돕기 위해 전쟁 중반부터 독일군과 싸우며 많은 전사자를 내고,

15만 이상의 독일군을 붙잡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00명 정도에 불과한 광복군이 전쟁을 했다 하더라도 승전국 대우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습니다.

4) 광복군의 전투력 측면

만약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활약 정도를 고려할 때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수십만 일본군 병력이 주둔했으며,

일본 제국 육군 헌병과 무장 경찰까지 포함한다면 상대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요국 기준으로 볼 때 잡병 집단이었지만,

차량화 보병과 중형 전차, 최신형 하야테 전투기 등을 갖추고 있었기에 몇백 명의 상대에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당시 광복군의 병력은 약 350~360명 정도였고,

광복군이 전력으로 진공 작전에 착수했다 해도 한반도를 해방시킬 수 있는 힘은 전혀 부족했습니다.

 

여기에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과 같은 게릴라 전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대규모 군사력 없이는 일부 후방 교란으로는 일제의 조선 통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시 국내 일부 독립운동 조직은 비밀결사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군사력 차이는 너무 컸습니다.

 

광복군의 전력만으로 조선에 주재한 일본군을 대항할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에서,

OSS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OSS의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는 점차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복군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더라도, 오히려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8월 18일경 이미 북한 지역으로 소련군이 진출하여 조선군을 격파하고 있던 상황에서,

몰락 작전을 이유로 미군의 한반도 진입이 늦어진 가운데,

광복군이 서울 진공 작전을 진행했다고 해도 병력이 500명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가정적으로 성과를 거두어 남한 지역을 점령했다고 해도, 북한에서 남하한 소련군에게 패하게 될 것이고,

이는 폴란드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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